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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황선 이제 엄마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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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아닌 엄마 황선 더 위대

 

 

황선의 처사를 나무란 JBC 까 13일자 방송

 

검찰에 의해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황선(41)이 14일 새벽 구속됐다.

황선은 전날 10시 30분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거친 후 이날 법원은 “소명되는 범죄혐의가 중대하고 재범의 위험성 등에 비춰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나는 이날 황선 구속 여부가 궁금했었다. 밤늦게 까지 구속 여부를 기다린 후 14일 새벽에서야 황선이 구속됐다는 뉴스를 접 한 후 잠을 잤다. 

내가 생면부지 황선 구속 여부를 궁금해 했던 이유는 그가 종북콘서트 논란을 빚은 당사자이며, 한국 사회를 부정하고 북한 사회를 찬양하는 종북좌파의 전형이라는 이유에서다.

나는 ‘JBC 까방송’을 비롯해 각종 글을 통해 그가 진행해 온 종북콘서트를 강도 높게 비난해왔다. 솔직히 검찰이 그를 구속시켜 한국의 정통적 사회 가치의 선을 그어주길 바랐다.

예상했던 대로 그가 구속되었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한국 현대사가 낳은 한 비극적 변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일제감정기를 거치면서 5천년 한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그 후 한국전쟁을 거친 후 남북한은 극심한 이념 대결과 각지에서 날카로운 대립의 각을 세워왔다.

그 과정에서 황선의 통일운동 씨앗이 싹트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고, 남북한이 갈라서지 않았다면 오늘날 ‘황선 돌연변이’가 태어났을까.

그 돌연변이는 남북한이 갈라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의식층 인사들이 겪는 고뇌의 반복성 변이기도 하다.

남북한이 통일되어 7천만 겨레가 하나 된다는 것은 황선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나아가 전 국민의 바람이다.

복잡다난한 사회에는 항상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존재해온다. 황선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만의 시각속에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북한 사회의 모습을 떠들고 역설하고 알리는 것은 사회의 한 단면적 전형이다.

나는 그런 행위가 권장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우리 사회의 건전한 비판의식과 추구하는 가치의 소중성을 깨달을 수 있는 발판이라 본다.

문제는 그것이 왜곡, 날조, 거짓, 그리고 꽉 막힌 이념에 똘똘 뭉쳐져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국 비난에는 열변을 토해냈던 황선, 정작 북한 인권과 수령주의 체제 등 전반에 걸친 것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닫았다.

틈만 나면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이라 지목했다. 그가 외치는 반외세 미제국주의 몰라내기. 반면 북한 체제를 찬양 옹호하면서 왜곡 날조까지 했다.

나는 이것이 황선의 악성 돌연변적 사고라고 본다. 나아가 ‘무식하고 색빨간 거짓말쟁’로 탄로난 신은미 등 종북 추종자들 머릿속에 깊숙이 처박혀 있는 악성 종북코드 바이러스라 감히 말한다.

  세상은 외눈박이 눈에는 외눈 세상만 보이게 마련이다. 황선이 외치는 그 웅장한 남북통일, 그 통일론만이 진리요, 길인가. 그래서 먼 훗날 시작은 미약했지만 뜻은 창대한 인물로 기록되고 싶었던가. 나는 그런 황선이 자신의 외눈박으로 본 현상 진실을 오도하고 외치는 그 무식함에 시궁창같은 역겨운 냄새가 나서 견디지 못하겠다.

이제 그는 마침내 법의 심판을 받는다. 14일 새벽 황선이 구속됐다는 뉴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또 하나 든 생각이 있다. 그의 아이들이다. 그가 종북콘서트 논란을 빚은 황선이든, 종북죄파에 물든 황선이든,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황선이든, 그 모든 것을 떠나 ‘엄마 황선’이 구속됐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걱정 됐다.

그가 구속됨으로써 한창 엄마의 사랑을 받고 성장해야 할 아이들은 누가 돌보는가. 나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그의 아이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부모의 사랑에 의해 아이가 태어난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성장해야 한다.

부모는 그 아이를 올바로 성장시킬 의무가 있다. 이 땅의 많은 부모가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육아라고 말하지만 아이를 등한시 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가 곧 미래이기 때문이다.

한창 성장해 가는 아이에게는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외 육아의 답이 없다. 그렇다고 일이 더 좋다고 아이를 내팽겨 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황선 또래 이 땅의 엄마는 “자식 키우기 어렵다”, “자식만큼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온갖 뒷바라지를 다 했음에도 ‘문제적 아이’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정말 필요한 때는 정해져 있다. 초·중·고 성장기 때다. 아이 둘이 초·중·고 다니면 엄마의 정신적 멘붕도 사치스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사회는 엄마라는 묵계가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식과 가족에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가지고 있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노동’이 끊임없이 ‘사랑’과 ‘희생’이라는 단어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시대와 환경이 달라도 그 사랑과 희생은 모계의 변치않는 불변적 본능이다.

황선도 둘 딸 아이를 둔 엄마다. 황선도 아이들과 함께 숙제를 풀고, 학원에 간 아이들을 위해 맛난 음식을 해주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키웠을 것이다.

두 딸을 데리고 국가보안법 폐지 시위를 벌인 황선

황선 딸이 비록 북한에서 출생했지만 아이는 죄가 없다. 그가 북한에서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옥동녀’로 불리우든, 그 딸에게 통일의 대를 잇는 의미에서 ‘겨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그 종북적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자식까지 이념의 희생양으로 만드려는 의도다. 그리고 종북콘서트 등 각종 종북놀이를 하면서 아이에게 관심을 덜 쏟은 그 엄마의 의무를 탓하는 거다.

황선의 큰 딸은 한국나이로 14세이고, 작은 딸은 열한 살이다. 엄마의 사랑이 가장 절실히 요구될 나이다.

모계 사회에서 “모성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너무 큰 오판이자 모험이다. 엄마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늘 애들 입에 찰딱 들러붙게 해야 한다.

자녀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엄마, 그게 이 시대 엄마의 증표다. 황선도 그러게 했을 거고, 또 그렇게 하고고 싶었을거다.

그러나 그의 종북토크쇼와 북한 찬양은 결국 스스로 엄마라는 무장해제를 자처한 꼴이다. 동포의 왕국에도 봄이 오면 꽃이 피듯, 나는 황선의 구속을 보면서 그래도 황선도 이 시대 엄마였구라는 사실을 까달았다.

무슨 말이냐면, 자식이 걱정되었는지 황선은 영장심사 도중 “두 딸을 길러야 한다”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종북 황선은 꼴 보기 싫지만, 엄마 황선을 떠올리니 그의 구속이 참으로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통일운동가 황선보다 엄마 황선이 더 위대하다.

 황선 이제 제발 엄마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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