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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재팬

[JBC의 재팬터치⓷]나의 첫 일본 방문, 일본 천황궁 앞 반일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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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1일 일본 천황이 거주하는 황실앞에서 '한일병합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왼쪽서 두번째가 이석씨다. 이 사진은 당시 현장에서 필자가 찍었다.

지금은 덜하지만 기자의 매력 중 하나는 해외 출장이다. 90년대만 해도 나는 미주는 물론 아시아권 등 전 세계를 다녔다. 당시는 지금처럼 해외로 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다른 나라는 많이 가보았지만 정작, 한국과 가장 까운 일본은 가보지 못했다.

일본 출장을 갈 기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데스크에게 “일본 출장은 가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래서 동료 기자가 대신 일본 출장을 가곤 했었다.

내가 일본 출장을 가지 않았던 것은 어릴때 부터 가져왔던 일본에 대한 적대적 편견 때문이었다.

내 고향은 부산 해운대다. 국내 최고 유명관광지 해운대에는 어디를 가도 일본인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나는 일본말을 하는 사람만 보이면 “쪽바리!”라고 욕하고 달아났다. 심지어는 저 멀리 숨어서 일본인을 향해 ‘새총’을 쏘운 후 달아나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 나는 에피소드는 나의 새총에 맞은 일본인이 “아, 누구야!”라고 했다. 그는 일본말을 하면서 해운대 백사장 인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새총에 맞자 한국어가 튀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재일교포였던 것 같다. 아주 오랜 일이지만 당시 새총에 맞은 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일본인을 무척 싫어하는 이유가 일본이 한국을 36년간 식민지배 했다는 것도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던 일명 흑의 장군, 정발 장군 때문이다.(부산역과 부산진역 사이에 동상) 나는 경주정씨다. 정발 장군은 경주정씨의 대표적인 어르신 이시다.

부산 초량에 있는 정발 장군 동상

나는 부산을 방문하면 부산역 인근서 소주 한 병을 산 후 주머니에 넣고 정발 장군 동상에 가서 그 주변에 뿌리곤 했다.

때문에 나에게 일본은 ‘응징’의 대상이지, ‘친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부산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런지 아니면 조선시대 일본들이 많이 거주해서 그런지 일본 문화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음식점에 가면 주인장은 이렇게 말한다. “아재야, 오늘은 ‘무스코(息子·아들)와 같이 왔네. 우아기(윗옷)는 위에 걸고 자부동(방석)에 편히 앉으이소.”

부산말에는 일본어가 많다. 내가 대충 아는 일본어만 해도 수없이 많다. 밴또→도시락, 뗀뿌라→오뎅, 에리→옷의깃, 바게스→양동이, 야마→머리, 오봉→작은상, 요지→이쑤시게, 가이단→계단, 오야붕-두목, 나와바리→구역, 모치→찹쌀떡, 삐끼→손님 끌기, 사라→접시, 쓰메끼리→손톱깎이, 시다바리→보조원, 에리→깃, 엔꼬→바닥, 와리바시→젓가락, 와쿠→틀, 유도리→융통, 지라시→선전지, 쿠사리→핀잔, 후카시→품재기, 겐세이→견제, 쇼부→결판, 쇼당→상담, 와이로→뇌물, 고뿌→잔, 렛테루→상표, 뼁끼→페이트, 엑키스→진액, 빠꾸→후진, 쓰레빠→실내화, 화이바→안전모, 다깡→단무지 등.

그런데 나는 솔직히 어릴 적에는 이런 단어가 일본어 인지 몰랐다. 워낙 일상 속 깊숙이 파고들어 사용했던 단어라 순수 우리나라 말인지 알았다.

무엇보다 라디오만 틀면 한국 방송 보다 일본 방송이 먼저 잡혔다. 당시 안테나도 없이 라디오에선 일본 방송이 나왔으니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웠던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일본에 가는 것이 마치 어릴 적 내가 괴롭혔던 일본인에게 붙잡혀 이지메(집단괴롭히)당할 것 같아서 꺼렸다.

일본출장은 기자생활 10년만에 가게됐다. 2001년도 쯤 이었다. 한 시민단체가 한국의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궁 앞에서 한일병합 무효를 외치고 시위를 벌이는 데 같이 취재를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한일병합 무효 시위 취재라면 독립투사 심정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데스크는 일본 동경특파원을 하다가 돌아온 선배였다. 그 선배에게 “일본에 한일병합 시위 취재를 가겠다”고 말했다. 취재 이유와 배경을 설명했더니 그 선배는 우려를 나타냈다. "잘못하면 일본 극우들에게 맞아 죽을 수 있다"며 황궁앞 시위는 하지 않기를 당부했다.

그러나 나는 이석씨 까지 가는 마당에 그것을 멀리서 불구경만은 할 수 없었다. 직접 동행해서 그들의 시위장면과 외침을 생생히 담고 싶었다. 나는 데스크를 설득했다.

다만 선배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잘못하면 한일 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니 가급적 천황궁 앞에선 시위를 하지 마라” 일본 천황궁 앞에서 시위를 하기 위해 가는 데 거기서 하지 마라면 일본은 안 가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석씨 등 일행들은 반일로 똘똘 뭉친 내가 가지 않으면 안된다며 같이 가자고 설득했다.

나는 선배에게 황궁앞 시위를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3월1일 하루 앞둔, 그해 2월 28일 기분 좋게 동경 땅을 처음 밟았다.

나의 일본 선입견은 공항에 도착하면서 무너졌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차별 무시한다니, 그런 게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친절함과 배려, 질서를 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동경 신주쿠를 가기 위해 안내원에게 물으면 그 보다 더한 친절한설명이 없었다.

난 순간 내가 주변으로부터 듣고 생각했던 일본이랑, 일본에 상륙한 후 일본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70년대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북한공산당은 전부 늑대로 배웠는데, 알고 보니 늑대가 아닌 것 처럼, 일본인들은 모두가 키 작은 원숭이 집단으로 여겼는데, 직접 보니 전혀 아니었다.

아마도 일본을 가본 한국인들은 우파든, 좌파든 필자와 같은 첫인상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정권이 앞장서 반일을 조장하고, 좌파들은 반일촛불을 들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지만 지금의 반일은 선동주의에 가깝다. 이것은 문재인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반일주의라 본다.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너네가 진정한 반일을 해봤니?” “그리고 반일이 뭔지 아니?”

2001년 3월2일 일본 후지산에서 이석씨(왼쪽)가 '한일병합 반대'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필자가 찍은 사진이다.

그래, 나는 기자신분으로 일본 황궁 앞에서 한일병합 시위를 주도했다. 또 일본의 상징 후지산에 ‘반일 깃발’을 꽂았다.

일본 경시청은 우리 일행들의 시위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일본 입국에 앞서 예고 기사를 쓴 게 화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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