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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마지막 백작 부인 덕혜옹주와 그 결혼봉축비

JBC(정병철) 2016. 8. 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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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일본 대마도(對馬島) 최고 기온은 35도였다. 찜통 더위가 모든 것을 태울 거 같았다


이날 덕혜옹주 결혼비가 세워져 있는 대마도를 찾았다.


마침 이날 한국에선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됐다. 이 영화가 개봉되면서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이 어느때 보다 높아지고 있다.


무더위 속에서도 덕혜옹주 기념비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덕혜옹주 기념비는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시 가네이시 성터<아래사진> 안에 있다.



왜 덕혜옹주 기념비가 가네이시(金石城) 성터에 자리잡고 있었을까.


가네이시 성은 16세기 소() 가문이 거주하였던 성이다. 당시 소 가문의 내분으로 저택이 소실되었다.


이 때 난을 벗어난 소 요시자네가 가네이시 저택을 수리하고 성벽을 쌓았다. 이 곳이 가네이성 성이다.


가네이시 성은 대마도 영주 소 가문의 거주지 인 셈이다. 덕혜옹주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는 것도 소 가문과의 관계 때문이다.


덕혜옹주 남편 소 다케유키(宗 武志 1908216~ 1985422)는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이었다.


일본인 혼마 야스코가 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원작德惠姬)

 책에 따르면 소 다케유키는 어렸을 때는 쿠로다 다케유키라 불리었다.


다케유키 아버지는 쿠로다 요리유키 였다. 나가사키에서 재판소에 재직했다. 나중에 요코하마로 전근을 갔었다. 중의원을 역임했다.


요리유키는 다케유키가 8세 때인 1917165세로 타계했다. 아버지 타계 후 쿠로다 다케유키가 소 다케유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것은 대마도 번주였던 사촌형 소 시게모치(宗重望)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다.


그 뒤를 이을 장자가 없자 소 다케유키가 소 시게모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로인해 소 가문의 당주가 됐다. 192310월 백작 소 다케유키가 되었다.


소 가문 백작이 되었던 소 다케유키는 그후 동경을 떠나 대마도에 거주했다.


소 다케유키는 대마도에서 초중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덕혜옹주는 1930년에 소 다케유키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난 지 1년 만인 1931년 결혼했다.


다케유키가 도쿄대 영문학과를 졸업할 때 였다. 일각에선 정략 결혼이라고 하는 데 이것에 대한 논란이 많다.


두 사람은 결혼 후 대마도를 방문했었다. 대마도 한 학교에는 덕혜옹주의 기념 식수가 있다.

소 문중의 당주가 신혼인 이왕가의 옹주를 데리고 대마도를 방문한다. 대마도인들은 대환영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조선의 마지막 옹주가 소 가문과 결혼했다는 소식에 등을 돌렸다고 한다.



가네이시 성터에 세워진 봉축기념비는 1931년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가 적혀 있다.<아래 사진>


이 결혼봉축비는 1953년 두 사람의 이혼으로 없어졌다가 200111월에 복원된 것이다.


덕혜옹주 결혼봉축비를 본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덕혜옹주가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조선의 마지막 옹주라며 가슴 아파 했다.


한 여인의 삶만을 놓고 볼때는 덕혜옹주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일본 대마도 백작 소 가문의 마지막 며느리였다


영화 덕혜옹주가 역사왜곡 논란에 빠진 것도 '덕혜옹주'를 독립운동을 한 여인 쯤으로 너무 미화했다는 이유다.


나는 영화 덕혜옹주에서 처럼 조선황실의 마지막 옹주 덕혜가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기구한 삶을 살았다는 등 그녀의 삶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덕혜옹주는 일제강점기 광풍에 정처 없이 흔들린 모든 조선 여자의 삶이었다.


덕혜가 옹주였기에 더욱 기구한 삶을 살았냐고. 당시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들의 삶은 핍박이었다.


그러나 덕혜의 운명은 기구했을 지언정, 그의 경제적 삶은 풍요로웠다. 덕혜옹주는 결혼전 까지 아카사카 대저택에서 줄곧 살았다.


그 아카사카 대저택은 영친왕이 살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아카사카 호텔 부지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대저택에서 살았던 덕혜가 그런 재일 조선인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거나 재일 한국인들을 돌보았는지 정말 궁금했다.

 

덕혜옹주는 결혼 후 1945년까지도 하인 10여명을 거닐고 도쿄 대저택에서 살았다. 그때 많은 재일 조선인은 태평양 전쟁에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그들의 아내는 일제치하에서 저항조차 제대로 못하고 사랑 하는 남편을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다. 덕혜옹주가 그런 남편을 둔 여인의 심경을 알까.

 

그의 삶이 그렇게 기구했다고. 설움 설움 중 배고프고 괄시받는 설움보다 더 한 것이 없다. 덕혜는 동경에서 배고픔의 설움을 겪어봤는가.

 

더욱이 덕혜 외동딸의 가출과 행방불명이 일제 때문이었고. 일본 백작 덕혜의 딸이 일제강점기때 박해를 당했다고.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다. 


나는 최근 일고 있는 영화 덕혜옹주의 왜곡성에 대해 지적하거나 비판하고 싶지 않다

영화의 창작성과 팩션은 인정되어야 한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영화는 영화라 해도, 덕혜옹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시대를 살고 간 사람의 숨길 수 없는 역사다.

 

내가 대마도서 만난 일본인들은 그런 덕혜옹주에 대한 찬양의 말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들은 덕혜옹주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다. 

 

때문에 대마도 덕혜옹주 결혼비는 슬픈 역사를 간직 한 비가 아니었다. 자고로 결혼비란 것은 '결혼축하비'다. 덕혜옹주에게는 기쁜 비란 말이다.

 

그 비는 조선 황실 마지막 옹주 덕혜가 일본 백자 소 다케유키 아내임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는 비다. 덕혜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는 비가 아니다. 조선인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은 결혼비다. 

 

덕혜의 기구한 삶을 보여주는 결혼비라고? 이 말을 들으니 쓴 웃음마저 나온다.  

 

내가 15년 전 취재경험담을 보태어 굳이 덕혜옹주에 대한 글을 적는 까닭이기도 하다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앞에 서서 명상에 잠긴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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