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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생모 성혜림 출생지 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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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성일기 씨 단독 증언 "혜림이는 계동에서 출생했다"

김정일 장남 김정남 외가는 북악산 혈통 

 

성혜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쯤인 2009년 여름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 한 후 1년이 흘렀을때 였다.

당시 필자는 북한 성혜림(1937-2002)의 오빠 성일기씨가 남한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성혜림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의 생모다.

김정남과 김정은은 아버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다.

 

 

김정일 장남 김정남, 이복동생 김정은 위원장

 

그런 성혜림의 오빠가 남한에 생존해 있다는 것은 향후 남·북한 관계에 비추어 볼때 아주 관심거리였다.

그 소식을 접한 후 필자는 곧바로 ‘성일기씨 찾아 삼만리’를 했다.

그를 수소문한 지 일주일만에 성일기씨 친구 정모씨를 경기도 분당에서 만났다.

의사였던 정씨는 성일기씨의 가족사를 꿰뚫고 있었다.

 

 

이한영

 

정씨는 성일기씨가 조카 이한영(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 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 피격 사건 이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고 전했다.

정씨는 “성일기씨에게 ‘연락처를 알려드려도 되는지’ 여부를 물어 본 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3일 뒤, 정씨로부터 성씨의 연락처를 파악했다.

필자는 성씨가 살고 있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 한 연립주택에 그를 만났다.

 

성일기씨와 그의 아내

 

당시 그는 약 서른평대 연립주택에 아내와 함께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필자가 수박 한통을 사들고 성씨 집을 방문하자, 성씨는 “이제 죽을 날도 멀지 않았는데 내 집 알려지면 어때, 다 늙은 노인 뭐 어찌 하겠어.”라며 반겼다.

당뇨병을 앓으면서 뇌출혈 증세까지 보인 그는 손발이 부자연스웠지만 가족사 등 과거의 기억을 거침 없이 토해냈다.

 그후부터 성씨와는 두차례 더 만났다.

그를 통해 성씨 일가의 가족사와 비애를 남김없이 전해들었다.

 

 

가족사에 대한 밝히는 성일기씨

 

그를 만난 후 필자의 첫 질문은 성씨 본인은 물론 성혜림·성혜량의 “출생지가 어디냐”였다. (당시 국내 언론들이 성혜림이 창녕 성씨인 관계로 출생지를 경남 창녕이라 보도했다.)

풍수학적으로 사람의 출생지를 분석하면 큰 틀에서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그래도 성혜림은 김정일의 동거녀였지만 한때 북한의 국모였다.

따라서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남북한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5년전 빛바랜 취재 수첩에 적힌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필자와 인터뷰하는 성일기씨

 

“성혜림 출생지가 창녕이 맞습니까.”(필자)

“아냐, 경남 창녕은 큰아버지가 사셨는데 방학 때만 잠깐씩 놀러 가는 곳이어서. 출생지는 서울 종로구 계동이야.”

“계동 어느쪽이신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필자)

“계동에 현대그룹 사옥 있지 그 뒤야. 아 참~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 알지. 여운형 선생이 살았던 옆집에서 나와 혜림이, 혜랑이가 태어나서.”

계동 현대 사옥 뒤편에는 독립운동가 여운형 집터가 있다.

 

 

 

현재 여운행 집터에는 한 빌라가 들어서 있다. <사진>

성혜림이 태어난 지역 주소지가 종로구 계동 140번지 일대.

성씨는 성혜림이 출생한 곳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그 옆이라고 했으니 사진속 부근이 유력하다. <아래 사진>

 

 

 

계동 뒤로는 북악산 마지막 줄기가 뻗어져 있다.

북악산 말바위에서 서울 성곽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내려가면 와룡공원이 나타난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후문 옆이다. 

또 계동 옆으로는 청와대가 있다.

 

 

 

이 청와대를 감싸는 산이 북한산과 삼각산이다. <위 사진>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 성혜림 출생지는 서울, 고영희의 출생지는 오사카입니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외가가 ‘북악산 혈통’이라면,

김정은 외가는 제주도라 ‘한라산과 오사카 혈통’인 셈이다.

두 사람 다 북한이 강조하는 ‘백두산 혈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남한에서 태어난 성혜림은 왜 북한으로 갔을까.

성혜림은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여기자였던 어머니 김원주 사이에서 1남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남한 거주할 당시 성혜림씨 가족 사진

 

성혜림은 서울에서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으로 진학했다.

중학교 다니던 그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월북했다.

성혜림은 북한에서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 <온정령> <백일홍>등에 출현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작가 리기영의 첫째아들인 김일성 종합대학 연구사 리평과 결혼 하였다.

그리고 옥돌 이라는 딸을 낳았다.

성혜림은 결혼후에도 연극영화 대학을 졸업 하였다.

 

 

영화 배우 시절 성혜림

 

그뒤 예술영화인 <분계선마을> 을 시작으로 북한 최고의 배우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혜림은 김정일을 만나면서 인생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김정일에게는 연상의 성혜림은 따뜻한 모정을 느끼게 해준것 같다.

당시 성혜림은 32세. 김정일은 27세 였다.

이 무렵 김정일은 계모와 권력암투를 벌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부녀와의 동거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혜림을 관저로 불러 들였다.

김정일은 그녀에게 푹 삐져 벼렸다.

결국 성혜림은 남편 리평과 이혼하고, 1969년부터 김정일과 동거가 시작된다.

그뒤 아이를 임신한 성혜림은 1971년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김정일의 첫째아들인 김정남<사진> 이다.

김정일은 아들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야 했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게 손자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다.

성혜림과 부도덕한 관계가 폭로 되는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언니는 우리 오빠 보다 나이도 많고 한번 결혼해서 아기도 딸린 여자이니깐, 정남이는 내가 키울태니 나가 주시오.”

성혜림에게 북한을 떠나 모스코바로 이주 하기를 종용 하였다.

이 말은 성혜림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던져 주었다.

결국 성혜림은 자식을 빼았기고 쫏겨날찌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성 질환과 불안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성혜림은 모스코바에서 치료를 받게된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버리고 다른 여자인 김영숙과 결혼을 한뒤 일이다.

김정일과 6년간의 사랑은 이렇케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출처=연합뉴스

 

성혜림은 갈수록 병이 심해져 밤마다 수면주사를 맞아도 잠을 자지 못하였다.

성혜림은 1996년 언니 성혜량과 성혜량의 딸 리남옥과 함께 신변치료차 머물렀던 모스코바를 떠나 스위스로 나온 후 잠적 했다가 다시 모스코바로 되돌아갔다.

불행한 세월을 보낸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코바 한 병원에서 ‘오순희’라는 가명으로 치료받다 2002년 5월 사망했다.

모스코바 온 지 28년이 되던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63세.

성혜림은 모스크바 서쪽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아들 내외가 묻힌 무덤 곁에 자리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묘는 봉분이 밖으로 크게 노출되는 등 주변 러시아인들의 묘와 구별되고, 묘비 뒷면에는 ‘묘주 김정남’, 묘비에는 ‘성혜림의묘’ 라는 글씨와 1937.1.24-2002.5.18일이 새겨져 있다.

당시 북한은 장례식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성일기씨는 성혜랑과 1993년 모스크바, 1996년 파리에서 각각 일주일간 만났다.

성혜랑과는 매일같이 만났으나, 성혜림은 사람들을 심하게 경계해 성일기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성일기씨는 성혜림은 “한국으로 망명오고 싶어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었다.

역사는 만약이 없지만 만약 김정남이 북한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성혜림은 어떻게 됐을까. <계속>

29일 오후 5시 TV로드쇼 정병철의 '까'를 통해 위 취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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