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학번 노길남, 64년 한일 시위땐 대학 2학년
사내들이라면 저마다 항상 입에 거품을 무는 무용담이 있다. 그 무용담은 자신을 과시 내지 으시하는 중요한 안주감이다.
사내들이 가장 많이 거품 무는 무용담은 군대 이야기 일 게다. 대한민국 남자 중 군대 가서 빨갱이 한명이라도 안 잡고, 사선에서 탈출했던 경험담이 없는 사람이 없을게다.
그리고 또 무용담 중 하나가 있다. 과거 학생운동권 혹은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했던 자들의 무용담이다. 솔직히 이런 전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튼 자신이 최고 투사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자신의 투쟁 덕분이었다. 그래 그대들이여, 눈물나게 고맙다. 그런 사내들은 자신의 시위를 훈장 내지 마치 마패 쯤으로 으시된다. 한마디로 가잖은 것들이다.
이제 노길남으로 넘어오자. 노길남도 자뻑 인터뷰와 영상을 통해 자신의 시위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노길남의 시위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이 쳐 먹고 그런 걸 뻐기고 싶을까라는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노길남 군대와 학번 의혹을 제기한 JBC 까방송
그러나 나는 왜 그가 그런 사실을 애써 강조하는 지 안다. 그가 종북장사꾼 내지 문화 간첩이기 때문이다. 노길남의 시위 무용담은 정신나간 인간들, 즉, 노브레인들에겐 통한다. 노길남 추종세력들만 보더라도, 이른바, 노길남을 영웅시 여긴다. 솔직히, 노길남이 과거 그런 시위 무용담이 없었다면 피래미 축에도 끼지 못할 그를 민족통일운동가 쯤으로 인정해줄까.
노길남이가 스스로 밝힌 시위 전력을 봤을 때 그가 진정 시위를 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한마디로, 빈깡통이 요란스럽듯, 세상사 자뻑하는 놈 중, 빈깡통 아닌 놈 못봤다.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해본다. “당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어떤 투쟁을 벌였는가?” 그 질문을 던진 후 파고들면 입가에 가득 고인 침들이 말라 비틀어질 것이다.
지난해 11월 말 최재영 민족통신 편집위원이란 자가,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을 인터뷰했다. 같은 매체에 종사하는 인간이 같은 매체 인간을 인터뷰해서 빨아(적어)줬다. 조선일보 편집위원이 조선일보 사장을 인터뷰해서 대문짝만하게 다룬 것과 뭐가 다른다.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다. 종북매체 자주민보에 실린 ‘노길남은 누군인가 -중-’ 편에서 노길남은 자신의 시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사실은 고등학교 1학년때 고려대학생 영향으로 우리는 4.19가 일어나기 하루 전인 4.18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한국문제연구회’ 서클활동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한일굴욕외교 저지규탄 시위에 참여하며 선배들과 시위도 조직하고, 선동선전 일꾼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공안당국에 쫒기는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대학2학년이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지 못하고 1965년 말께 군대에 입대해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학교에 다시 돌아와 보니 또다시 3선개헌 저지투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때에 또다시 운동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대문경찰서, 남산의 중앙정보부 등에 연행되어 고초도 겪은바 있었습니다.”
#1. 의혹 4·18 데모
그가 밝힌 고등학교 4·18 시위 참여는 1960년이다. 4·19 항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다. 4·19는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반정부 항쟁이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3,000여 명이 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한 후 귀교하는 길에 동대문 사단 이정재 부하들의 습격을 받았다. 안암로터리와 대광고등학교에서 경찰과 충돌하는 등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당시 충돌현장에 있었던 낙화유수 김태련 옹(2006년 작고)은 “귀교하는 고려대생들이 우리를 마구 폭행해서 충돌한 사건이다”고 밝혔다. 어쨌든, 당시 4월 18일 대광고 부근에선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 따라서 노길남이가 그날 그 시위와 폭력 사태를 본 후 자신이 시위에 동참했다고 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2. 의혹. 서클 활동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한국문제연구회’ 서클활동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64학번이다. 그런데 그는 1960년 4·18 시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가 재수를 한 후 연대에 입학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런데 그는 대학에서 연대 영자신문 기자로 활동했었다고 전했다. 학내 기자라면 눈코뜰새 없이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한국문제연구회에 가입했다. 이중 서클 활동이 가능했을까.
65년 3학년임을 밝힌 노길남 학생증
3. 의혹. 한일 굴욕외교 시위
“한일굴욕외교 저지규탄 시위에 참여하며 선배들과 시위도 조직하고, 선동선전 일꾼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공안당국에 쫒기는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대학2학년이었던 시기입니다.”
한일 굴역 외교 데모는 1964년 3월 24일 발생했다. 그런데 노길남은 “대학교 2학년 때 굴욕외교에 저지규탄 시위에 참여했고, 공안당국에 쫒기는···” 이라고 밝혔다. 노길남은 1964년도 연세대 입학했다. 그런데 64년도 대학 2학년. 그의 학생증을 보면 1965년 대학 3학년생이다. 그렇다면 그는 몇학번인가. 63학번인가. 64 학번인가.<사진 위 학생증 참조>
4. 의혹. 3선개헌 저지투쟁
“3선개헌 저지투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때에 또다시 운동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3선 개헌 투쟁은 1968년 6월 12일 서울법대생 500여 명이‘헌정수호 성토대회’를 개최한 이래 69년 12월까지 계속된 학생들의 개헌반대운동이다. 그가 군대를 갔다 온 시기와 3선 개헌 투쟁시기와 엇비슷하다. 이것은 그가 64학번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군대를 65년말에 갔다가 68년 말 제대했다.
5. 의혹. 중앙정보부 연행 고초
“서대문경찰서, 남산의 중앙정보부 등에 연행되어 고초도 겪은바 있었습니다.”
노길남처럼 자신의 시위에 자뻑하는 사람이 중앙정보부까지 끌려갔는데 고초라는 점잖은 표현을 썼다. 그가 해석하는 고초와 고초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시위에선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어 잡혀갔고, 그 중 상당수가 훈방되어 풀려났다. 그것을 고초라 해석하는가. 특히 그는 ‘중앙정보부 등에 연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까 조사를 받았다는 사람이 고문을 안당했다.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니면 그는 학생운동 동태를 경찰 혹은 정보원에 넘겨주는 ‘파이프 맨’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호는 노길남 유학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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