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광풍, 불의와 맞서지 않는 침묵자들
태극기 든 민초만이 침묵 깨, 자유대한 외쳐
문재인 좌파 독재 정권이 몰락했을 때 웃는 자가 누구일까. 태극기를 든 민초일 게다.
문 좌파 정권이 몰락한 후 우는 자가 누구일까. 역시 태극기를 든 민초가 될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병자호란 때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6.25 남침 때도 민초들이 웃고 울었다. 이들이야 말로 나라를 살린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라가 백척간두 위기에 서 있을 때 숨죽였던 비열한 자들이 평온을 되찾으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촛불광풍을 불러일으켜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구속을 시켰는데도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침묵해 해버렸다. 문재인 좌파 정권이 그후 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를 알면서도 이들은 침묵했다.
이들의 침묵을 대신해서 정치에 ‘정’자로 몰랐던 민초들이 진실과 정의를 외치고 있다. 대한민국 지식인들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문재인 정권이 자유대한민국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데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유가 무너지고, 시장경제가 파괴되고, 국가파탄이 눈 앞에 왔는데도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한다. 아주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때로는 정의로운 척, 진실자인 척 한다. 하나같이 입을 닫고 침묵의 안전지대에 피신중이다.
#침묵의 방관자들
1964년 3월 13일 금요일 새벽 미국 뉴욕 퀸스 지역 주택가에서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라는 여성이 강도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제노비스는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약 35분 동안이나 3번에 걸쳐 칼에 찔려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몸부림쳤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왜 38명의 목격자는 한 여인의 피살을 외면했는가? 이른바 ‘방관자 효과’ 또는 ‘구경꾼 효과’를 두고 ‘제노비스 신드롬’이라 일컫는다.
한국판 제노비스 신드롬이 지식인 사회에 강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거짓 선동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했다. 지식인들은 이것이 마녀사냥인 것을 알지만 촛불광풍의 돌팔매가 두려워 침묵해버렸다.
문재인 좌파 독재는 대한민국을 망가뜨리고 재앙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지식인은 여전히 침묵한다. 행여 이에 대한 비판을 했을 경우 그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법대 교수 신랄히 비판
최근 SNS를 통해 받은 글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들을 신랄히 비난하는 글이다.
“그대들은 법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사건에서 헌재의 평결이 그대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법에 합당한가? 합당하다면 합당한 이유를 발표하라! 합당하지 않다면 합당하지 않는 이유를 발표하라! 그대들은 권리를 행사할 때는 서울대 법학 교수이고 의무를 져야 할 때는 왜 언어장애인이 되는가? 그러고도 대한민국 최고 지성이라고 자부하는가 ? 그대들의 그 부끄러운 침묵은 쓰레기 같은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 전국의 법학도, 법대 교수들은 쓰레기인가? 법치가 죽어가고 헌법이 파괴되는 오늘을 침묵하고도 대한민국 법조인으로서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는가? 오늘도 법학을 배우고 오늘도 그 쓰레기 법을 가르치는가? 교육이란 것이 가르치기만 하면 끝인가 ? 법학 교수로서 국가적 평결이 그대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를 때 국민에게 알리고 바로 잡아야 하지 않는가? 법은 만인에 평등해야 하고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고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판결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저 많은 사람이 절차, 정당성 모든 사항에 의문을 제기함에도, 그대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쥐새끼 같이 숨어서 의사를 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그대들의 일신 안위를 위한 자세가 진정한 지성인이 가져야 할 자세인가? 서울대 법대 교수 여러분! 그대들의 침묵이 겁먹은 쥐새끼들의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자세로 오늘도 그대들은 강당에서 그따위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가?
그런 양심으로 부끄럽게 살려고 하는가? 차라리 법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쓸모없는 법을 가르치는 법대를 해체하라! 그것이 조금이라도 대한민국을 위하는 충성이요 속죄가 아니겠는가?”
#지식인이여 부끄럽지 않는가
이 글은 서울대 법대 교수들을 향한 질타의 글이지만, 어쩜 대한민국 지성인들을 향한 질타의 글인지 모른다.
대한민국 정치인, 학자, 언론인, 종교인 등 모두가 비겁한 침묵자와 방관자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작은 언행을 진실과 정의의 이름으로 합리화 시킨다.
그들은 때로는 진실과 정의인 척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합리화 시키고 타당화에 열을 올린다. 교활한 위선이 따로 없다.
이런 침묵이 깨진 것은 분노였다. 그 분노속에는 진실과 정의가 살아 숨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불법 탄핵과 구속에 분노하고, 문재인 좌파독재 정권에 분노하고, 이를 이용하는 정치인의 교활함에 더욱 분노를 느끼고 있다. 지식인에 대한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문재인 좌파 독재로 인해 자신들의 일상이 무너진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역사와 세상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에 대해 분노로 맞서고 있다.
분노가 침묵을 깨는 도화선이다. 태극기를 든 것은 조국을 사랑하는 분노의 표출이다. 이 분노 속에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 참음과 희망이 내재되어 있다.
대한애국당을 창당하고, 태극기 시민단체들이 만들어진 것도 실은 분노에 의해서다. 분노로 뭉친 조직은 한 순간이고, 그 분노의 거품이 가시면 그 담부터 이성이 찾아온다. 우리는 분노를 먹고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사회변혁과 체제를 바꾸는데서 만들어지는 조직은 결국 이데올로기가 깊이 박혀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분노는 나라를 살리는 촉박한 분노다. 분노는 일종의 국민 원성이다. 그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국민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다. 태극기 시민들이 내뱉는 분노의 함성은 하늘의 함성이다.
#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
알란 페이턴(Alan Paton) 소설 ‘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는 남아프리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하여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문학 작품이다.
이 소설은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의 끔찍함을 폭로하고 있지만, 여전히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조국 남아프리카를 위한 외침 그 자체이다.
그 사람들과 그 땅과 증오, 가난,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그 잠재적인 희망을 위한 외침이다.
태극기를 든 많은 분들이 자유대한을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해외의 많은 교포들도 조국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조국을 외치고 있다.
차갑고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2년 이상 갇혀 있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눈물을 흘린다.
태극기를 든 사람들 역시 그 분노의 이면에는 희망이 있기에 버티고 있다. 분노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체념했다. 하지만 그 힘의 근원은 잘못된 대한민국을 다시 세워야겠다는 희망이다.
오늘날 좌파가 체제 전복을 뒤집는 데 앞장선 키워드가 ‘분노’였다. 좌파들은 자본주의에 분노, 자유에 분노, 빈부에 분노, 신분에 분노, 출생에 분노, 그 분노를 아주 교묘하게 정치 사회학적 힘으로 결집시켰다.
지금 탄생한 문재인 좌파 정권, 이 정권을 뒷받침하는 민노총, 전교적 등 그 이면에는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 일으킨 촛불시위도 분노에서 출발시켰고, 박 대통령 탄핵과 구속도 분노에서 비롯됐다.
문제는 좌파들은 이 분노를 조직화 했고, 여기에는 좌파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분노의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우파는 이 분노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승격화 시키지 못했다. 우파 지식인들은 침묵했다.
좌파들은은 소외된 자들의 분노를 말해주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다. 그들은 분노를 행동으로 옮길 구체적인 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파는 그렇지 못했다. 분노 속에 열정이 있지만, 그 열정적 분노가 나라를 밥을 먹여주는 것도 나라를 바꾸어주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지식인들도 이젠 더 이상 태극기 뒤에 숨어선 안 된다. 침묵은 비겁자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가식이다.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1821년-1878년)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결국 침묵자들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을 더 이상 지식인이라 부르면 안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하는 지식인. 그래서 침묵한 지식인 역시 공조자다.
<JBC까 탄핵의 저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탄핵의 저주는 이번 편으로 끝입니다. 더 다양하고 알찬 글을 통해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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