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부친 일제시대에 금융조합 서기
금융조합은 일제의 대표적 수탈기구
22일 오후 5시 JBC까 방송 하기 직전이었다. 인지연 대한애국당 수석 대변인 명의로 논평이 날아왔다.
제목은 ‘태극기부대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제 정신인가!’
인 대변인은 “정동영이라는 민주평화당이란 곳의 대표가 있다. 그가 오늘 오전 “태극기부대 상당수는 일장기를 흔들던 사람들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아무런 사실 근거도 없이, 자신의 망상으로 우리 태극기 혁명전사들에 대해 허위사실로써 우리 태극기부대의 명예를 감히 훼손한 것이다”고 비난했다.
방송 직전에 날아온 논평이라 정동영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사전 확인 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애국당이 정동영 발언에 대해 얼마나 분통했으면 ‘정동영 개인’을 상대로 ‘제정신인가’라는 논평까지 냈을까.
난 이 논평을 본 후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한애국당이 오늘 정동영에 대한 논평을 발표했는데, 사실은 정동영이 친일파 가족이다.”
나는 정동영 부친이 친일 행적을 한 사실을 소상히 알고 있다. 지난 2007년 10월 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동영과 그 가족사 히스토리를 추적하면서 그의 부친 친일행적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이를 확인했었지만 기사에는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한 줄 걸치는 식으로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적었다.
나는 ‘과거사=연좌제 적용’에 반대한다. 이 문제는 정동영 부친의 전력이지 정동영 개인의 친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권과 좌파들은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친일파라고 공격하고 있다.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까지 친일 프레임으로 가두었다.
정치권은 선거철만 앞두면 친일 논쟁을 벌였다. 지난 2012년 4월 쯤,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지금의 바른미래당 하태경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당시 총선을 얼마 안 둔 시점에 하태경은 한 커뮤니티에 “내가 볼 때 살아 있는 노인들 99% 이상이 친일한 사람들”이라며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친일 안 하고 배겼겠는가”라고 적었다.
당시 야당은 이것을 문제 삼으면서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태경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등 압박했다.
하태경은 “선거 때만 되면 일제시대 때 살아간 사람들 누구나 닥치는 대로 친일로 모는 정략에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 해명했다.
하태경의 말 마따나, “살아 있는 노인 99%가 친일했다”는 말은 대한민국은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치권에서 괜히 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되레, 공격을 당한 후 곤욕을 겪었던 자들이 한 두명이 아니다.
정동영도 그 중 한명이었다. 나는 2007년 12월11일 [스페셜 리포트] ‘정동영 후보의 진짜 출생지를 찾아내다’는 제하의 단독 기사를 내보냈다.<위 사진>
당시 대선 후보로 출마한 정동영을 검증하기 위해서 이 같은 취재를 했었다. 언론은 정동영의 출생지 조차 확인하지 않고 본적지를 출생지로 기정사실화해 보도했다. 일반인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정치권에서 정동영 출생지와 그의 부친 친일 행적이 논란이었다. 나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전북 순창으로 향했다.
내가 가진 정보는 정동영 호적등본 달랑 한 장이었다. 등본에는 그의 본적지가 전북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544번지이었다. 정동영은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
또 정동영 선산이 있는 전북 순창군 구리면 통안리 바우재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일부 언론은 정동영 출생지로 이곳을 기정사실화 했었다.
그러나 당시 정동영 숙부 정진형씨를 만나서 인터뷰 하면서 정동영 출생지가 이곳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순창군 구림면청 부근이란 얘기도 있었다. 숙부 정씨는 "형님(정 후보 부친·정진철)이 구림면장을 지냈을 때 잠시 살았던 집이어서 동영이가 그곳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자의 출생지를 모른다는 것은 결국 국민을 속이는 행위와 같다고 본 나는 정동영이 순창 어디서 출생했는지 반드시 찾을 각오를 다졌다.
마침내 정동영의 진짜 출생지를 찾았다. 그 출생지를 찾으면서 정동영 부친에 얽힌 친일 행적과 정동영의 진짜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정동영은 1953년 7월 27일 전북 순창군 순창읍 옥천동에서 출생했다. 옥천동은 행정구역 지명이 개편되면서 순창군 순화리로 바뀌었다.
지금의 주소지는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259-1번지다. 정동영 출생지 바로 옆에는 순창군청이 있다.
정동영이 출생한 곳으로 가리키는 정동영 숙부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정동영 부모는 율북리에서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런 가운데 정동영 숙부<위 사진>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정동영이 순화리에서 출생한 것은 6.25 전쟁 때문이야, 형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금융조합 서기로 일했는데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하면서 재산을 몰수 당했을 뿐만 아니라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당시 전북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은 순창군 구림면에 위치한 회문산에 인민군 전북도 당사령부를 뒀다. 남한 빨치산 유격대의 본거지로 소설 '남부군'의 주 무대가 된 곳이 바로 회문산이다. 회문산은 정 후보 부친이 살았던 율북리와 불과 10여㎞ 떨어져 있다.
정동영 부친은 인민군을 피해 피난을 갔으며, 이 과정에서 정동영 형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잇따라 세상을 떴다. 정동영 부친이 여러 곳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자리 잡은 곳이 순화리다.
지금은 2층 양옥집이지만 정동영이 출생할 때는 초가집이었다. 숙부 정씨는 "형님은 자식들이 잇따라 죽자 동영이를 광주리에 넣어 시렁 위에 올려 길렀다"라고 회고했다. 그래서 어릴 적 정 후보의 별명이 '시렁'이었다고 귀띔했다. 정 동영은 열 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통안리 바우재로 이사를 갔다.
당시 취재를 하면서 또 한가지 확인한 것은 정동영 실제 나이였다. 1953년생인 정동영 나이는 우리 나이로 67세다. 그러나 정동영 부친은 1961년 8월 29일 출생신고를 했다. 지금 나이로 59세다. 실제 나이와 호적상 나이가 차이가 난다.
숙부 정씨는 "출생신고만 하면 조카들이 잇따라 죽었기 때문에 형님은 동영이가 또다시 죽지 않을까 해서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형은 동영이 동생들과 함께 그 날짜에 출생신고를 했다"라고 해명했다.
내가 정동영의 가족사에 대해 이렇게 상세히 적는 것은 당신의 가족사를 알고 있으니 까불지 마라는 경고가 아니다.
정동영이 일장기를 든 후예인지,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일장기를 든 후예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정동영은 태극기 부대 등 극우 세력들을 100년 전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애국지사들을 짓밟았던 친일파 세력에 비유했다.
정동영은 또 “독립운동가는 3대가 망한다는 역설을 청산해야 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친일파들이 반공을 무기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모욕을 줬다”며 “의열단을 이끌고 가장 희생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지사 김원봉 선생은 친일파 고등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종로경찰서에서 3일 간 고문을 받았고 통곡하고 월북했다”고 말했다.
정동영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오늘날 되새기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을 제대로 기리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한반도 친일파 청산의 역사를 갖지 못한 우리 부끄러운 공화국 100년의 역사를 이제라도 평화당이 앞장서 친일 잔재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친일문화 청산특별위원회를 결의하고 위원장에 장정숙 의원을 임명했다”고 설명했다.
정동영의 친일 제기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정동영은 친일 제기로 인해 그것이 오히려 부메랑으로 자신에게 날아가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정동영은 지난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부친의 친일의혹을 제기했다.
정동영은 2002년 2월28일 ‘일제잔재 청산 등을 위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을 통해 “일제하에서 15년 간이나 총독부 검찰서기로 근무한 이회창 총재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이총재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국민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었다. 당시 정동영의 이 총재 부친 친일 의혹 제기는 화제를 끌지 못했었다.
그런데 정동영의 친일 제기가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17대 대선 후보가 되면서였다. 당시 정동영 부친의 친일행적이 드러났다.
당시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은 “정 후보의 아버지 정진철씨는 일제 말기 금융조합에 들어가 해방될 때까지 근했다”며 “일제통치하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금융조합에 들어간 것은 일제하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일제시대 당시 금융조합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일본으로 공출하는 농민착취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차 의원은 “정진철씨가 금융조합서기로 근무하던 시기는 농민의 80%가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며, 한반도 産出米(산출미)의 60%이상이 공출로 수탈됐던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착취가 기승을 부렸던 때”라고 설명했다.
당시 나와 단독 인터뷰한 숙부 정씨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한 증언을 했었다. 정씨는 “형(정진철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실습차 구림면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졸업과 동시에 정식 직원이 됐다”고 밝혔다.
정씨는 “형은 해방직전까지 4~5년 근무했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일하다가 미군정 시절 관선 면장이 됐다”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정동영 부친은 6.25전쟁 당시에는 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살아 남은 게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여길 수 있지만 당시 인민군은 친일파를 대부분 처형했다. 정동영의 당숙인 정진호씨는 6.25전쟁 기간 중 좌익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정동영 부친은 살아 남았다는 이유로, (좌익)부역 혐의자로 몰려 국군 11사단 정보과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정동영 부친은 군의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난 뒤, 대한청년단 순창군 구림면 단장을 맡으면서 국군에 적극 협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동영 부친의 친일 행적을 완전히 들추어 낸 것은 당시 한 진보 좌파 매체에 의해서였다.
이 매체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정동영 부친 정진철 면장은 당시 순창 근처에서 가장 좋은 ‘남원보고’를 졸업하고 일본제국주의 조선 착취 최일선기관인 ‘금융조합 서기’를 무려 장장 5년 이상 황국신민으로써 충성을 다하여 소작농민의 피를 빨아먹으며, 열심히 황국신민의 역할을 다 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고 기술했다.
정동영의 부친인 정진철씨가 일제시대에 금융조합 서기가 논란이 된 것은 당시 정진철씨가 서기로 일했던 금융조합이 일제의 대표적 수탈기구였던 ‘조선식산은행’ 산하라는 점과 지금의 금융조합장 역할을 하던 시기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일제의 산업동원령이 선포된 시점이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정동영 측 해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정동영 측은 “특별한 입장표명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동영 같은 친일파의 자식 여부가 아니다. 민족의 굴곡 깊은 현대사 속에서 친일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소위 ‘친일정체성’은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의 어두운 그늘까지 옥죄면 안된다. 정동영은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정동영 입에서 차마 태극기 일장기 후예라는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참고로, 종북 좌파들은 김일성이 독립운동가니,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의 초기 내각과 군부 등 핵심인사 16명이 친일파로 당시 남한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진성 친일파’다. 그런 자들이 이승만 정권의 건국세력들을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정동영의 이런 주장은 부친의 과거 행적을 은폐하고 정당화하고 미화하고자 하는 것과 대한민국 태극기 세력들을 친일로 모는 종북좌파들 역사관과 연장선상에 있다.
친일도 ‘내로남불’인가. 내 가족의 친일은 독립운동이요, 태극기의 애국운동은 친일행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정동영은 사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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