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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C시선

태극기 우파는 어떻게 단련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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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체제전쟁이다. 첫 출발은 커밍아웃 선언이다

대한애국당 연단은 애국의 재단이여, 구국의 재판이어야

한국의 우파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순수하고 이성적인 감성을 들어내라, 그 온정주의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너그러움도 걷어차라, 거만하고 오만하고, 잘 난 척 태도를 버려라, 안주함과 나태함은 태워버려라. 이것은 인간이 먹고 살 때 생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성 표출이자 도덕 윤리적 행위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죽고 사는’ 문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냐, 민중민주주의냐를 놓고 대결중이다. 문재인 좌파 독재정권과 김정은의 합작 사회주의에서 살 것인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자유시장경제에서 살 것인가. 지금은 체제논쟁중이 아니다. 전쟁 중이다. 이 자리에 치열함과 독함을 채워 넣어라. 근본 문제에 대한 접근과 그 접근 방식을 놓고 왜 피 터지는 논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좌파라 해서 인간주의와 이성과 감성이 메말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위, 체제를 바꾸자고 할 때, 체제를 바꾸었을 때도 이런 이성과 감성은 독이된다는 인식탓이다. 체제를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의 최대적은 실은 온정주의다.

좌파들은 그래서 더욱 자신들을 단단한 강철로 단련시킨다. 지금 문재인 정권을 포섭해 있는 주사파들은 바로 80년대부터 이 강철로 다듬어지고, 단련된 자들이다. 모래성 같은 우파가 이런 강철 같은 주사파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1980년대 중반 대학가 주체사상 교범이 있었다. ‘강철서신’이다. 이 강철서신은 국내에 주사파 이론을 처음 소개한 김영환이 적었다.

그 후 ‘강철’론은 대학가를 휩쓸었다. 모두가 강철 같은 인물이 되고, 강철 같은 조직을 만들자고 맹세를 했다. 각종 집회 구호에선 강철이 빠지지 않았다.

‘전대협 진군가’ 노래 가사에도 ‘강철 같은 우리의 대호’라는 구절이 나온다. 강철조직은 모래알 조직이 되지 말자는 것이다. 모래알 조직이 되면 질서가 없고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된다는 부정적인 의미다.

좌파들의 필독서가 있다. 러시아 오스뜨로프스끼의 자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이 책은 좌파의 사상과 정신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내전, 경제정책 시기와 레닌의 사망,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까지 인간과 조직의 변화를 써내려갔다. 혼돈과 투쟁, 성취와 실패, 환희와 좌절이 교차했던 대격변 시대에 결국 강철 정신으로 버티어야만 살아남는다는 교훈을 주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을 집단과 조직, 강철 같은 규율로서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불굴의 인간, 실천하는 인간, 순수한 인간성을 부각시켰다.

좌파들의 이런 강철 정신이 오늘날,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몰아내고, 좌파 촛불민중봉기를 통해 자유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우파들은 이런 좌파들의 정신과 이념적 무장을 너무나 모르고 무시해버린다. 우파는 우파의 시각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나약하고, 냉-온탕적 사고에 젖어 있고, 이로 인한 이성과 감성의 롤로코스터를 탈 뿐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선의, 이해가 체제를 이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가족주의적이고, SNS로 단합이 잘되는 친목적인 조직이 체제 승리를 안겨다 주는 것도 아니다.

1차 체제전쟁에 승리한 좌파 문재인 정권이 도대체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 것일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2차 체제변화에서 문 좌파 정권은 북한 김정은과 어떤 음모를 그릴 것인가. 이에 따른 경계와 우려만 할 따름이지 근본적인 질문과 논쟁도 없다.

한 시대에 따라 그 정권을 바라볼 때, 어느 변화가 중요하고, 어느 변화가 덜 중요하지 않다. 그 변화의 징후를 예측하고 거기에 따른 대비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책조차 없다.

한 특정 사안에 대해 논리적으로 경합하는 대신 서로가 자기 말이 옳다는 노골적 천박함을 드러낸다. 이 우격다짐 천박함 앞에서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개념인가.

우파는 목소리가 큰 사람과 증오와 분노가 더 심한 사람이 이긴다. 그 논쟁에 없었는데도 목소리 큰 자들의 주장이 맞겠지 동조 한다.

“그게 아니다. 저 ‘목소리가 작은 그 사람의 주장이 맞다’”고 말하는 것이 나를 무시한다고 오인한다.

혁명의 기운이 전 유럽을 휩쓸던 19세기 말~ 20세기 중반까지, 혁명을 목표로 투쟁을 하던 운동가들이 스스로의 엄격한 도덕성을 다짐하기 위해 만든 용어와 방법론이 있다. 자아비판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혁명가가 세 치 혀를 통한 선동과 카리스마만으로 움직인다면 너무도 쉽게 타락할 수 있다.

말로만 정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도록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자아비판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자아비판이 상대를 걸고 넘어지는 정치투쟁의 장이 되는 변질로 확산되었지만 이 자아비판은 동지들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마음가짐으로 들어 주고 함께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보수는 이런 자아비판에 대해 귀가 열렸을까? 자아비판을 했다가는 날벼락 당하기 일쑤다. 상대를 비판만 하면 “너나 잘해”라고 질식시킨다. 또 “왜 못 믿느냐”고 되레, 윽박지른다.

왜 좌파가 정권을 잡았고, 체제전쟁에서 우파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지 그 이유가 짐작된다.

문재인 정권의 좌파 지형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 지형을 잘못 읽은 측면도 있다. 우파의 감성주의와 천박함이 스스로 눈을 닫게 해버렸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사상이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좌파가 절대적 진실과 정의, 선이라는 독점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체제전쟁 후 한국 사회는 이상한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다. 사회구조와 정치, 경제체제 법과 제도, 각종 제도와 사회 시스템 등이 무너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체성이 변형중이고, 역사가 왜곡되어 뒤집히고 있다.

그런데도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지키겠다는 자들은 오히려 좌파들을 떠받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체제가 형성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이루려는 의심의 형국이다.

각종 태극기 단체에서 활동 중인 태극기 우파 리더들은 ‘탄핵무효, 박근혜 대통령 석방, 문재인 정권 퇴진’구호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신하려고 한다. 이것만 드러내면 무조건 동지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작금의 현 상황에서 자신과 조직의 입장을 교묘히 강화 시키려는 의도로 의심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백번 항변해도 소용없다. 그냥, 커밍아웃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면 그만이다.

체제전쟁에서는 좌쪽이냐, 우쪽 이냐가 선택의 기준이지만, 우파가 승리하기 위해선 우파의 확실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대한애국당을 선택할 것인가. 자유한국당인가.

그 체제전쟁의 첫 출발이 이 커망아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파가 강철로 단련되어가는 첫 용광로다.

다시강조 한다. 카밍아웃을 해라. 정체성을 밝히라. 감히 말한다. 이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태극기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들이 우리의 동지인가.

상대의 정체성조차도 모른 채, 아무나 신성한 애국의 재단(연단)에 올라온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동정으로 감싸 안아 주고 있다.

기회주의 우파에 속았고, 체제전쟁에서 패해서 박 대통령까지 불법 감금 당했는데도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

대한애국당 연단은 ‘애국의 재단’이요, ‘자유의 재단’이요, ‘구국의 재판’이다. 체제 승리를 위한 단합과 충정의 재단이요, 자유대한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재단이어야 한다.

자유대한민국의 순수한 피가 서야하는 까닭이자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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